현 노로돔 시하모니 왕의 부왕인 노로돔 시하누크(1922-2012/89세) 선왕은 공식적인 결혼을 두 번 했다고 한다. 1955년 3월 4일에 시하누크(32세)는 1946년부터 함께 살던 외사촌 노로돔 타웻 노렐레악 공주를 제1 부인(妃)으로 책봉했다. 그리고 다음날에 현재의 대비인 노로돔 모니니엇 시하누크(Norodom Monineath Sihanouk)를 제2 부인(妃)으로 책봉했다. 당시 모니니엇은 후궁 서열 6위로서 공식적인 결혼 전에 이미 시하누크와 살면서 현 시하모니 국왕과 고(故) 나린드라뽕 왕자를 낳았다. 이후 시하누크(46세)가 제1 부인과 이혼하면서 1968년부터 모니니엇이 정실부인이 되었다.
참고로 아래 표는 시하누크가 19세인 1941년 제위한 이래 중첩적인 혼인 관계를 유지한 6명의 후궁들과 자녀 14명의 리스트이다. 고인이 된 자녀들 중에는 왕립무용수이자 문화예술부 장관을 지낸 보파 떼위 공주, 1993년 입헌군주국 캄보디아의 초대 제1 총리 라나리드 왕자, 백혈병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깐타보파병원(KBH)의 유래가 된 깐타 보파 공주가 눈에 띈다. 짜끄라뽕 왕자는 현재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아룬레스마이 공주는 상원의원으로 생존해 있다.
순서 | 후궁의 성명 | 혼인 기간 | 자녀들(*성 Norodom 표기 생략) |
첫째 | Phat Kanhol (1920-1970/50세) |
1942-1946 (이혼) |
Buppha Devi(1943-2019/76세) 제1공주 |
Ranariddh(1944-2021/77세) 왕자 | |||
둘째 | Sisowath Pongsanmoni (1929-1974/45세) |
1942-1951 (이혼) |
Yuvaneath(1943-2021/78세) 제1왕자 |
Ravivong(1944-1973/29세) 왕자 | |||
Chakrapong(1945~/79세) 왕자 | |||
Sorya Roeungsi(1947-1976/29세) 공주 | |||
Kantha Bopha(1948-1952/4세) 공주 | |||
Khemanourak(1949-1975/26세) 왕자 | |||
Botum Bopha(1951-1975/24세) 공주 | |||
셋째 | Sisowath Monikessan (1929-1946/17세) |
1944-1946 (별세) |
Naradipo(1946-1976/30세) 왕자 |
넷째 | Norodom Thavet Norleak (1927-2017/90세) |
1946-1968 (이혼) |
없음 |
다섯째 | Mam Manivan (1934-1975/41세) |
1949-1975 (별세) |
Sujata(1953-1975/22세) 공주 |
Arunrasmy(1955~/69세) 공주 | |||
여섯째 | Monineath (1936~/88세) |
1952-2012 (별세) |
Sihamoni(1953~/71세) 국왕 |
Narindrapong(1954-2003/49세) 왕자 |
[표: 노로돔 시하누크 선왕의 후궁들과 자녀들]
모니니엇 대비의 일반인 이름은 폴 모니크 이지(Paule Monique Izzi)이다. 1936년 6월 18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이공(현 베트남의 호치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 프랑수아 이지(Jean-François Izzi)는 이탈리아계 프랑스인 은행가로, 사이공에서 주택금융공사(Crédit Foncier) 이사진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 중에 사망했다. 어머니 뽐 삐엉(Pomme Peang)은 프놈펜 출신이었다. 안 마리 이지(Ann Mary Izzi)라는 남동생도 있었다. 모니크는 노로돔 초등학교, 시소왓 중고등학교, 르네 데카르트 프랑스 학교를 다녔다. 15세이던 1951년 미인 대회에서 1등을 수상하고 당시 29세인 시하누크 왕(재위 1941-1955)을 만나 이듬해인 1952년 4월 12일 함께 살면서 모니크 비(妃)로 불렸다.
시하누크가 왕위를 부왕에게 이양하고 총리로서 독재정치를 할 때, 31세 무렵의 모니크 비는 1967~1970년에 캄보디아적십자사(CRC)의 총재를 역임했다. 1970년 론놀 장군의 쿠데타로 시하누크가 총리직에서 축출될 때는 모니크 비도 비난을 받아 그녀의 형상이 공개 화형 되기도 했다. 비난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녀가 당시 부왕의 서거로 재위한 시어머니 씨소왓 꼬싸막(Sisowath Kossamak) 여왕과 시하누크 왕자 간에 긴장 관계를 유발했다고 한다. 또한 총리인 시하누크로 하여금 카지노를 도입하게 부추겨서 국가를 타락시켰다고도 한다. 모니크 비의 모친과 남동생이 저지른 부정 인사와 부패도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쿠데타로 시하누크는 모니크 비와 함께 중국과 북한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975년 크메르루즈 집권기에 프놈펜 왕궁으로 돌아오지만 이듬해 가택연금 상태에 처했다. 처형이 예정된 부부는 중국과 북한이 당시 정권에 압력을 가한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1955-1975)과 뽈뽓 정권이 자행한 대량학살로 인해서 시하누크의 부인들과 자녀들도 상당수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1991년 역사적인 파리평화회담 이후 모니크 비는 시하누크 왕자와 함께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1993년 입헌군주국 캄보디아의 군주로 재기한 시하누크(71세)는 모니크(57세) 비를 노로돔 모니니엇 왕비로 승격시켰다. 2004년 10월, 훈센 총리가 왕족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자 시하누크 왕은 왕위를 내려놓았다. 당시 그는 모니니엇 왕비가 섭정으로서 왕위를 계승하도록 헌법을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그녀와의 아들(51세)에게 왕위를 양위하기로 했다. 올해 88세인 모니니엇 대비는 CRC 명예 총재로 활동하고 있으며, 선왕과 자신의 아들인 시하모니 왕과 함께 공식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건재하다.
최초 작성일: 2024년8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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