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8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 사이의 협상이 긴장과 실패로 끝나는 것을 지켜본 캄보디아 국회의원 키우 깐나릇(Khieu Kanharith) 전 정보부 장관은 1987년 캄보디아 전쟁을 종식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삼자 정부와 협상할 당시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과 훈센 총리가 보인 영웅적 행동과 용기의 사례를 회상했다. 이와 관련하여 현지 언론 크메르타임즈 보도(2021년10월22일자)를 참고하고자 한다.
19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 내전에 개입한 후, 그에 따른 갈등은 극복하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베트남은 중국을 배제한 협상을 거부했고, 중국은 협상 자체를 단호히 거부했다. 게다가 베트남은 크메르루주에 역할을 부여하는 어떤 합의도 고려하지 않았다. 중국의 지원을 받는 크메르루주는 자신들을 배제한 합의는 있을 수 없다고 맞섰다. 당시 노로돔 시하누크 전 국왕은 1976년 이래로 프놈펜에서 가택연금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79년 1월 초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시하누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 출석하여 캄보디아의 주권, 영토 보전, 독립을 호소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두 분파 간의 충돌로부터 캄보디아를 구하려는 그의 노력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한발 물러나 프랑스에서 북한의 평양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친분이 각별했던 김일성 주석의 환영을 받았다. 당시 1979년과 1980년에 ASEAN, 중국, 미국은 왕당파, 공화주의자, 독립 캄보디아인과 "민주 캄푸치아(DK)"로 알려진 크메르 루즈 정권의 잔당이 함께하는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 했다.
1980년 8월, 시하누크는 미국 의원 스티븐 솔라즈를 평양에 초대해서 내전으로 고통받는 캄보디아에 평화를 가져올 시나리오를 논의했다. 시하누크가 강조한 핵심 조항은 a) 적대 세력을 무장 해제하고 통제할 강력한 국제평화유지군, b) 유엔이나 국제 통제 위원회의 감독하에 실시하는 총선이었다. 중국은 1980년과 1981년 평양에서 시하누크를 방문한 여러 사절을 통해 크메르루주, 시하누크, 손산의 연합이야말로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과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가 공동으로 제안한 바에 따라, 시하누크는 1981년 3월 키우 삼판과 DK 대표단을 만나 연합 전선 형성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의 핵심 조항은 a) 모든 캄보디아군의 무장 해제, b) 엄격한 국제 통제하에 캄보디아의 중립화, c) 유엔 감독 총선거 및 유엔 평화유지군이었다. 이외에도 시하누크는 내부적 통합과 외부적 중립을 위해서 국제회의를 통해 베트남과 정치적 타협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프랑스 사회당의 지도자 프랑수아 미테랑은 1981년 2월 북한을 방문해서 프랑스가 주최하는 국제회의를 긴급 소집해야 한다는 시하누크의 주장에 동의했다.
시하누크는 ASEAN, 중국, 미국 및 기타 여러 국가의 지원을 받아 1982년 6월 쿠알라룸푸르에서 공식적으로 수립된 연합에 가입하기로 동의했다. 민주 캄푸치아 연합 정부(CGDK)는 시하누크를 대통령으로, 키우 삼판 씨를 부통령으로, 손산을 총리로 두었다. 그러나 CGDK는 베트남이 실질적으로 철수할 때까지 프놈펜과의 모든 협상을 거부했다. 이러한 입장이 너무 경직되어 있다고 생각한 시하누크는 CGDK 수장을 1년간 휴직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CGDK를 떠나 프놈펜 정부와 베트남 당국과 화해 가능성을 모색하기로 천명했다.
당시 훈센 총리도 시하누크와 회동을 시도했으며, 이를 통해 캄보디아 갈등이 종식될 것으로 기대했다. 1983년 앙골라 공식 방문 중 훈센은 캄보디아인 의사와 결혼한 프랑스 대사 장 자크 갈라브루를 만났는데, 그는 이전에 프놈펜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갈라브루 대사는 나중에 시하누크와 훈센 사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고, 1987년 12월 2일 페레앙타르두아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미테랑 대통령은 1989년 1차 회의에서 캄보디아에 관한 파리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1991년 10월 파리 평화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최초 작성일: 2025년03월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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