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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이해 칼럼/국가&정치

캄보디아 전범: “키우 썸펀”, 유일하게 생존한 크메르루주 지도자

by 까페브라운 2023.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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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ECCC에서 항소 판결을 듣는 키우 썸펀(91세) 전 크메르루즈 국가 수반 (출처: phnompenhpost.com)

 

키우 썸펀(Khieu Samphan; 1931년생)은 스와이리엥주 출신으로 부친이 프랑스 식민지 정부에서 판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썸펀이 어린 소년일 때 부패 혐의로 부친이 유죄 판결을 받는 바람에 모친이 과일과 채소를 팔아 생계를 꾸려야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프랑스 대학의 입학 자격을 취득하고 몽펠리에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파리대학에서 박사를 취득했다.

 

1950년대에 썸펀은 파리 소르본대학의 좌파 크메르 지식인 그룹의 일원이었다. 캄보디아의 경제와 산업 발전에 관한 1959년 박사 학위 논문에서 그는 민족의 자립을 주장하고 종속 이론가들의 편에 서서 제3세계 국가의 빈곤을 부유하고 산업화한 국가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또한 그가 창립에 가담한 크메르학생협회(KSA)1970년대 캄보디아 역사를 뒤흔든 크메르루즈를 성장시켰다. 캄보디아에 귀국 후 프놈펜대학교에서 법학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프랑스 좌파 출판물을 창간했다가 정부의 호된 탄압을 받고 금지됐다.

 

1950년대 캄보디아의 실리를 위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진영을 오가는 서커스 외교를 취하던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총재로 있던 사회주의 정당에서 썸펀을 영입했다. 이후 1962, 1964, 1966년 총선에서 좌익의 대표자로서 론놀(Lon Nol; 1913-1985)이 이끄는 우파 세력을 압도적으로 제쳤다. 경제부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정부가 제공하는 리무진 차량을 거절함으로써 비교적 겸손하고 소박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966년에 시아누크 국왕이 우익을 통제할 목적으로 조직한 '반정부' 조직의 일원이었으나, 썸펀의 급진주의 성향은 조직의 분열을 초래하고 그도 체포 영장이 발부되어 쫓겨 다녀야 했다.

 

크메르루즈가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한 1975년 7월의 키우 썸펀 (출처: aljazeera.com)

 

1970년 캄보디아는 론놀의 쿠데타 성공으로 시아누크 국왕이 축출되고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하는 크메르 공화국이 선포됐다. 이에 따라 썸펀을 비롯한 크메르루즈는 폐위된 시아누크 국왕과 함께 캄푸치아민족연합전선(FUNK)으로 알려진 반크메르 공화국 연합 및 관련 정부(GRUNK)를 설립했다. GRUNK에서 썸펀은 부총리, 국방부 장관 및 인민 해방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1975년 4월 FUNK는 크메르 공화국을 전복하고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했다.

 

1980년 반띠민쩨이주 말라이군에서 키우 썸펀 (출처: aljazeera.com)

 

크메르루즈가 집권한 민주 캄푸치아 시대(1975-1979)에 썸펀은 1976년 중앙 상임 의장직과 같은 고위직을 맡았다. 또한 정권 말엽의 숙청에서 생존한 것으로도 뽈뽓(Pol Pot; 1925-1998)에 대한 충성도를 엿볼 수 있다. 1985년에는 공식적으로 뽈뽓의 뒤를 잇는 크메르루즈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1998년까지 유지했다. 199812, 뽈뽓의 직무를 대행했던 누언 찌어(Nuon Chea; 1926-2019)와 함께 정부군에 항복했을 때 당시 훈센 총리가 국제적 압력을 무시해서 썸펀을 체포하거나 기소하지 않았다.

 

2007년 11월, 76세의 썸판은 뇌졸중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때는 전 크메르루즈 부총리 겸 외무장관인 엥사리(Ieng Sary; 1925-2013)가 아내와 함께 전쟁 범죄로 체포된 직후였다. 그 무렵 출간한 『민주 캄푸치아 시대까지의 캄보디아 역사 성찰』에서 자신은 사회 정의와 국가 주권 수호를 위해 일했을 뿐 모든 정책적 책임을 뽈뽓에게 전가했다. 또한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는 정책은 없었다. 대량학살을 수행하기 위한 어떤 방향도 설정되지 않았다", "인민의 복지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항상 있었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부족한 식량 생산을 위해 강압을 사용했다고 인정했다.

 

캄보디아 법원 특별재판부(ECCC) (출처: phnompenhpost.com)

 

체포된 썸펀은 2008년 4월, 캄보디아 법원 특별재판부(ECCC)에서 많은 사람이 살해된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국가 원수로서 어떠한 범죄에도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항변했다. 20148,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에도 집단학살 혐의는 별도의 절차로 재판을 계속됐다. 201811, 베트남인 2만 명에 대한 학살 범죄로 유죄가 선고됐지만, 10~50만 명의 참족 학살은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판결됐다. 썸펀은 유죄 판결을 뒤집기 위해 20218월에 항소했지만, 올해 922일에 항소가 기각됐다. 이에 따라 대량학살, 반인도적 범죄, 제네바 협약의 중대한 위반에 대한 유죄 판결이 확정됐다.

 

프놈펜 뚜어슬렝 대량학살 박물관의 사진 전시실에서 관람중인 방문객들 (출처: phnompenhpost.com)

 

 

최초 작성일: 2022년9월28일

1차 수정: 2023년4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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