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끔쏘카 총재를 그렇게 주목하지는 않았다. 삼랑시보다는 대중적으로 카리스마가 유약하고 별로 약삭빨라 보이지도 않는데다가 외모를 거론해서는 안 되겠지만 다소 왜소한 체구가 덜 매력적이다. 아! 그런데 어느 언론사에서 내놓은 사진에서 가택에 연금되어, 고개를 떨구며 눈물짓는 노모 옆에서 허공을 향해 전하는 그의 지친 미소는 뭐랄까, 어디서나 처연한 정치인의 시간은 유사하게 반복되는 것 같다. 그의 모습은 마치 대한민국의 파란만장한 민주화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정치인 고 김영삼 대통령의 가택연금 시절 사진과도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끔쏘카는 캄보디아의 대표적인 인권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2012년부터 CNRP(캄보디아구국당)의 부총재직을 수행하다가 2015년11월에 삼랑시 총재가 범죄자가 되어 입국을 포기함에 따라 총재직을 인계받았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깜뽕짬주 국회의원으로서 2014년8월-2015년10월에 국회 첫 부의장, 2016년12월-2017년1월에 소수당 원내총무로 보직했다. 그러나 2017년9월3일 미국과 음모해서 정부전복을 계획했다는 반역혐의로 수감되고 곧이어 CNRP도 대법원 판결로 해산된다. 현재는 2018년9월10일에 보석으로 석방되어 가택에서 구금 중(*)이다.
(*)2019년11월 법원은 보석의 제한을 완화해서 끔쏘카의 국내여행을 허용했다. 그러나 정치활동 및 해외출국은 금지되고 법원의 소환에 언제든지 응해야 한다. 2020년 현재 반역죄 재판은 COVID-19 팬더믹 사태로 지난 3월에 중단됐다.
끔쏘카는 1953년6월27일에 따께오주 뜨람깍의 농가에서 출생했으며 조부는 대대로 면장을 역임했다.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에 입성했을 때 왕립법경제대학교(Royal University of Law and Economics) 법학과 2학년에 재학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친은 사살당했고 1979년 베트남군이 프놈펜에 입성할 때까지 그는 농부로 살아야 했다. 이후에는 손산 일파의 크메르인민해방전선(KPNLF)에 가담해서 베트남군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그로 인해서 위험이 목전에 다다르자 도망치듯이 체코 유학생의 길을 떠났다고 한다.
1981년 체코슬로바키아 장학금을 받아서 프라하의 화학기술대학교에 입학하고 1986년 화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에 귀국했다. 그러나 당시에 산업부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괴뢰정부 치하에서 크메르인민해방전선(KPNLF)에 가담한 이력으로 인해 체코에서 유학한 엘리트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CPP 정부에서 감시와 차별이 뒤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중앙 권력의 주변인이 되어 약자들의 인권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결국 1991년에 ‘캄보디아인권감시단’을 조직하고 국제인권단체와 연대해서 인권활동을 전개했다.
본격적인 정치 경력은 1993년에 손산의 불교자유민주당(BDLP) 소속으로 따께오주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시작됐다. 당시에 캄보디아의 입헌군주국 헌법에서 인권에 관한 조항을 제정하는 데 참여했으며, 국회의 인권위원회 의장으로서 5년간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포럼을 주도하며 당시의 최대 이슈였던 ‘토지분쟁, 토지퇴거, 토지횡령’ 문제 해결을 위해서 힘썼다. 1999년에는 왕당파 푼신펙당으로 당적을 옮기고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지만 2001년에 정계를 떠나서 2002년에 캄보디아인권센터(CCHR)를 설립했다.
당시 끔쏘카는 개발도상국 캄보디아의 빈곤하고 외진 마을에서 풀뿌리 수준의 시민 및 정치적 권리, 사회 및 경제 개발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며 자유롭고 개방된 포럼을 유행시켰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CCHR 라디오방송을 통해 대중적으로 인권교육을 전개함으로써 캄보디아의 다양한 인권 이슈를 수면위로 끌어올리고 시민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활동들로 인해서 2005년12월10일 세계인권의날에 구속 수감되지만 오히려 그의 정치적인 인기와 역량을 한층더 높이는 계기로 작용한다.
2007년7월에는 인권당(Human Rights Party)을 창당하고 2008년 총선에서 CPP(90석)와 삼랑시당(26석)에 이어 국회의석 3석을 차지했다. 드디어 2012년에 삼랑시당과 통합함으로써 CNRP를 창당하고 끔쏘카가 풀뿌리 수준에서 다져놓은 지방의 민심과 삼랑시가 프놈펜과 서방의 이민자 사회에서 끌어온 자금력과 인기를 결집한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와 통합의 원리가 작용했던 2013년의 총선에서 야당이 그 어느때보다 크게 도약하는 해가 됐다. 바로 끔쏘카가 유행시킨 ‘도우(바꿔)! 도우!’ 구호를 전국의 젊은이들까지 목청껏 연호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캄보디아의 정국과 민심의 향방은 어떻게 전개될까? 2018년 총선을 전후해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초한 선거는 더이상 꿈도 꾸지 말라는 식으로 훈센 총리는 막가파식 독재를 전면으로 행사하고 있다. 그의 의지에 따라 국왕의 사면도 철회되고 국민이 뽑아준 거대 야당의 공중분해는 물론 자신을 저격하는 언론인에게 묻지마 총살까지 자행됐다. 그러면서 자신들 덕분에 국가가 안정과 번영을 누린다고 자찬이다. 아직은 그의 협박과 위협이 통할 만큼 아직은 국민들이 70년대 내전과 90년대 쿠데타의 역사를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초 작성일: 2019년11월30일
1차 수정: 2020년4월30일
2차 수정: 2020년9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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