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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이해 칼럼/역사&전통

캄보디아 근대역사: 9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탈출기

by 까페브라운 2020.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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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왕국은 중세 암흑기 말엽에 태국과 베트남의 공동속국으로 전락하면서 국력이 극도록 쇠약해졌다. 앙두엉 왕(재위: 1840-1859)의 통치기에 잠깐의 평화와 번영이 찾아오지만 자력갱생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던 왕실은 유럽 열강을 의지처로 물색했다. 때마침 프랑스도 1862년 베트남 남부에 식민지를 건설한 후에 태국과의 사이에서 완충지를 모색하던 중 크메르왕국으로부터 보호국을 자처하는 요청을 받았다. 마침내 1863년8월11일, 노로돔 왕(1860-1904)이 프랑스 보호령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노로돔 국왕(출처: wikipedia.org)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호치민에 기반을 두고 캄보디아의 프놈펜에는 프랑스인 통감이 파견되었다. 초기에는 프랑스인 총독이 캄보디아에서 왕정의 해체를 시도했지만 캄보디아인들과의 충돌을 우려해서 왕권을 제한하는 정도에서 유지시켰다. 그런데 1885년에 형제 왕자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프놈펜주재 프랑스인 통감이 노로돔왕으로부터 전권을 이양받는다. 이어서 1897년에 통감은 프랑스황제의 재가를 얻어서 국세징수, 법령제정, 관리임명, 왕선출 등의 권한까지 완전히 몰수함으로써 캄보디아의 왕은 명목상의 왕이 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캄보디아의 지배를 강화하면서 18세기 후반까지 원래의 캄보디아 영토였던 땅을 수복했다. 1896년 프랑스와 대영제국의 협정에 따라 태국으로부터 바탐방을 수복하고, 1902년과 1904년 태국과의 조약을 통해 쁘레아위히어 및 쩜빠삭, 바싹강의 통제권을 프랑스가 가져왔다. 1907년 프랑스와 태국간의 조약에서도 씨엠립과 바탐방에 관한 영토분쟁 및 교환을 합의했다. 물론 194012월 프랑스-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의 참전으로 바탐방, 시소폰, 씨엠립(시엠립 타운 제외) 및 쁘레아위히어가 다시 태국으로 넘겨지기도 했다.

 

식민지 초기에 프랑스는 캄보디아를 베트남보다 경제적으로 중요도가 높다고 보지 않아서 개발을 등한시했다. 그러나 1893년 프랑스-태국 전쟁 이후 프랑스의 통치가 정점에 이르면서 캄보디아에서도 쌀과 후추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 개발이 점차로 진행됐다. 특히 바탐방 지방에서는 식민지 기업가들에 의해서 현대적인 농법이 도입되었다. 프랑스에서 자동차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프랑스인 투자자들은 고무농장을 건설하고 운영했다. 1920년대에도 경제 다각화가 계속됨에 따라 옥수수와 면화 작물이 재배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식민지 국가들 중에서 캄보디아에 1인당 가장 높은 세금을 착취하면서 캄보디아인을 베트남인에 비해서 열등하게 대우했다. 이에 프랑스식 교육을 통해서 크메르제국의 자부심과 인식을 키운 지식인들은 당시의 불평등한 식민지 구조에 반발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표적으로 1936년부터 손응옥탄(Son Ngoc Than)과 빳쯘(Pach Choeun)은 반식민지 및 반베트남 신문 ‘앙코르제국(Nagaravatta)’를 발간했다. 1940년에는 태국의 캄보디아인들 사이에서 무장단체 크메르이싸락(Khmer Issarak)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1941년 일본 군대(출처: wikipedia.org)

2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가 함락돼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의 지배력이 약화됐을 때 일본제국이 침략해서 1945년3월9일 프랑스 총독부를 해산시켜 버린다. 일본은 전쟁물자 조달을 목적으로 노로돔 시하누크 왕에게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하도록 부추기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아래 편입될 것을 촉구했다. 4일후 캄보디아에 독립이 선언되고 손응옥탄은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지만 일본제국의 패망으로 그해 10월에 캄보디아는 다시 프랑스의 식민지로 환원된다. 그렇지만 그해 3-10월의 독립의 기쁨을 캄보디아인들은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1941년,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출처: wikipedia.org)

1946년 프랑스는 캄보디아에서 캄보디아인들이 정당을 조직하고 헌법초안을 작성하기 위한 국회를 열도록 허용했다. 이로써 캄보디아는 절반의 독립을 쟁취하지만 반프랑스파 민족주의계열의 민주당이 득세하던 국회는 왕실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마침내 시하누크왕은 1952년6월 직권으로 내각의 해체를 선언하고 헌법을 중지시켰다. 이어 자신의 아버지 노로돔 수라마릿(Norodom Suramarit)공을 섭정으로 임명하고 19533, 프랑스로 날아갔다.

 

표면적으로는 여행을 빙자했지만 실상은 캄보디아의 완전한 독립을 허가받고자 프랑스 정부를 설득할 요량이었다. 당시 캄보디아의 여론의 향방은 완전한 독립을 조속히 이루지 못할 경우에 자칫하면 손응옥탄 세력과 무장단체 크메르이싸락의 연대로 왕실이 전복당할 처지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그러한 상황인식을 가볍게 무시하고 오히려 시하누크왕을 협박하며 돌려보냈다. 그 길에 세계 여론에 캄보디아의 독립을 호소하는 성과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빈손이었던 시하누크왕은 차마 프놈펜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씨엠립 왕궁에서 머물렀다.

 

그러던 중 인도차이나 전역의 군사상황이 악화되었고 1953년7월3일 프랑스 정부는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에 전적으로 독립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8월말부터 1954년까지 국가의 주권에 영향을 미치는 국방, 사법, 경찰, 재정에 관한 통수권을 캄보디아의 시하누크왕에게 인계했다. 이렇게 캄보디아 백성의 눈에는 프랑스 독립의 아버지가 된 시하누크왕은 개선장군이 되어 프놈펜으로 영광스럽게 돌아왔고 1953년11월9일은 무려 90년간의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탈출한 캄보디아의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프놈펜의 독립기념탑(출처: wikipedia.org)

 

 

최초 작성일: 2019921

1차 수정: 2020년4월30일

2차 수정: 2020년10월1일

 

 

 

*** 위 글에서 부적절한 표현이나 보완할 내용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위 글은 뉴스브리핑 캄보디아 칼럼 [캄보디아 더 알아보기] 및 산림청과 한국임업진흥원이 발간한 "캄보디아의 이해"(2020) 책자에도 수록된 내용으로서 저작권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내용을 참조하실 때 꼭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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