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이해 칼럼/문학&예술

캄보디아 소설: 프랑스 식민지 항쟁 기록 『품데리찬』

까페브라운 2022. 8. 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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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데리찬』 책 표지(출처: khmertimeskh.com)

『품데리찬』덕끼엄(Deuk Keam; 1936~)과 드윽엄(Deak Om; 1934~)1964-65년에 집필해서 1971년에 출간했다. 실재를 반영한 역사소설로서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 있던 1925418일 깜뽕츠낭주 끄랑리우 마을에서 캄보디아 농민들이 식민 통치자들에 맞서 봉기한 사건을 그렸다. 당시에 프랑스는 식민지 국가들 중에서 캄보디아에 1인당 가장 높은 세금을 착취하면서 캄보디아인을 인접국인 베트남인보다 열등하게 대우했다. 프랑스 행정관들은 가난한 농부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의 세금 납부를 독촉하기 위해서 고문과 학대를 자행했고 이에 따른 반감은 유혈폭동으로 발전해서 오늘날까지도 대표적인 저항의 기록으로 남았다.

 

 

1914-1919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캄보디아는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 있었다. 프랑스가 나치 치하의 독일과 전쟁을 할 때는 캄보디아인들을 전쟁에 동원해서 싸우도록 했고, 캄보디아 본토에서는 계속되는 세금인상으로 고혈을 짜내고 있었다. 당시 껀달주에서는 3,000명의 주민들이 씨소왓 왕(1904-1927 재위)에게 이러한 세금 문제를 경감해 줄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날씨조차 농민의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폭염이 기승을 부렸고 파고다의 탑이 벼락을 맞는 등의 일련의 이상 현상으로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어도 가난한 농사꾼 쏘완 씨는 전쟁에 동원된 동생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 고향인 캄뽕츠낭주로 돌아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세금 독촉에 시달리던 그는 병을 앓던 아내를 치료 한번 하지 못하고 떠나보내고 만다. 아내와의 사이에서 자식들을 두었지만 가난 때문에 전통적인 혼례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사이였다. 그러니 장례식이라도 치를 돈이 있었겠는가? 쏘완 씨와 같은 사람들이 세금 문제로 인해서 피눈물을 흘리고 통탄하고 있을 즈음 같은 마을에 사는 쭌 씨너으 씨는 동조하는 무리 20명과 함께 프랑스인 관리자 빠데스 총독을 죽이려는 계획을 모의했다.

 

사진 속 인물은 빠데스 총독에게 최초의 일격을 가한 것으로 알려진 분(출처: phnompenhpost.com)

프랑스인 관리자 빠데스 총독은 지역민이 처한 어려움이나 생계는 아랑곳없이 중앙 정부에서 요구하는 세금 목표치를 충당하기 위해서 주민들을 괴롭히는 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일전에는 면장이 보고서를 통해서 주민들의 가난한 실상을 전하고는 세금 거두는 일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고 밝히면서 사의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빠데스 총독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세금을 걷겠노라고 경호원과 통역관, 요리사를 대동해서 집집마다 순시를 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세금을 독촉하는 과정에서 사람들과 갈등을 빚었는데 쭌 씨와 너으 씨는 그 틈을 노려서 망설임 없이 빠데스 총독과 무리를 처단할 수 있었다. 이날이 바로 1925년 4월 18일이다.

 

이때 구사일생으로 죽음을 모면한 요리사는 시내로 도망쳐서 당장 상부에 보고를 올렸다. 그래서 반란에 성공한 쭌 씨와 너으 씨를 비롯한 무리가 깜뽕츠낭시로 진격하던 중에 매복한 프랑스 군대에 의해 거의 사살되고 말았다. 쭌 씨처럼 살아남은 일부는 체포되어서 감옥에 수감되거나 아니면 산 속에 꽁꽁 숨어서 자취를 감추었다. 빠데스 총독의 죽음은 프랑스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에 따라 씨소왓 왕에게 교지를 내리게 해서 끄랑리우 마을의 이름은 짐승처럼 야만적인 마을이라는 의미로 ‘품데리찬’으로 부르고 빠데스 총독이 살해된 자리에는 탑을 세워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마을 이름을 ‘ 품데리찬 ’ 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캄보디아의 씨소왓 왕(출처: khmertimeskh.com)

 

빠데스 총독을 추도하는 탑(출처: khmertimeskh.com)

위와 같은 사건을 통해서 품데리찬이라는 마을 이름은 주민들을 모두 살인자로 취급하고 죄의식을 심어 주려는 의도를 깔고 있었다. 주민들은 애도와 죽음의 색인 흰색 바탕에 검은색 테두리를 한 신분증을 소지해야 했으며 다른 마을로 주소지를 이동할 수도 없었다. 현재까지도 빠데스 총독의 위령제를 위한 탑은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 탑은 빠데스 총독을 추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식민지 역사를 통해서 끄랑리우 마을에 가해진 수치를 기억하기 위한 이다.

 

 

 

 

최초 작성일: 2022년5월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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